🎤 믿음을 가진 자로서 살아간다는 것

도서출판 비아 10주년 기념 특별 강연 - 인문학자의 비아 

일시: 2023. 11. 24. 오후 7시-8시 30분 

장소: 대한성공회 대학로교회 

❧ 그 때 그 책을 읽었을 뿐이다 

내가 철이 들어 세상 물정을 좀 깨달았을 때는 ‘우리나라는 사람 살 데가 못 되는 곳’이라는 자각 밖에 없었다. 내가 철학과 1학년 학생이었던 1980년의 한국은, 여기 계신 분들도 다 아시다시피 정말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런 곳을 지금 이렇게 그나마 괜찮은 곳으로 만들어 낸 데에는 많은 이들의 피와 땀이 들어갔다. 나는 이런 일에 조금도 기여한 바가 없다. ‘여기서 살지 말아야지’ 하는 불만이 가득한 상태에서 세상을 곁눈질하며 살았을 뿐이다. 

지금 내가 손에 들고 있는 이 책들, 게르트 타이센의 ⟪예수 운동의 사회학⟫과 존 게이저의 ⟪初期 基督敎 形成過程 硏究⟫를 군에서 제대하고 복학했을 무렵, 1985년에 읽었을 것이다. 학자 집안에서 자란 것도 아니고 책 좀 읽는다는 친척도 없었으며, 하다못해 집에 성경책이 있는 기독교 신자 집안도 아니었다. 강의에 필요한 교재도 내 것으로 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는데 철학과에서 배우는 과목도 아닌 이 책들을 서울 한복판 종로2가에 있던 서점 종로서적에서 ‘사서’ 읽었다. 그 뒤로도 몇 권 관련된 것들을 읽어서 학부 졸업 논문을 썼다. “종교의 제도화에 관한 고찰”이라는 제목이었을 것이다. 신흥 종교 운동을 이끄는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사라지면서 초기의 열광적 분위기가 가라앉고 다음 세대의 공동체에서 제도화된 교단이 형성되는 과정을 다루었다. 

대학원에 진학해서 실천철학, 형이상학을 공부하면서 신학 책들은 전혀 읽지 않았다. 내가 신학 책들을 다시 읽기 시작한 것은 대학에서 벗어나 강의를 하지 않고, 그에 따라 공부도 하지 않는 회사원 생활을 하던 시절부터였다. 신학 책 만이 아니라 그때서야 나는 호메로스니 셰익스피어니 하는 이른바 인문학 고전들을 읽었다. 

이번에 강연을 하기 위해 그간 읽은 신학 책들을 좀 추려보았다. 성서신학에 관한 것들이나 주석서들을 많이 읽었다. 바울 관련도 조금 되고, 삼위일체론, 헤겔의 종교철학과 관련된 것들, 동방정교회, 가톨릭 계열 출판사에서 나온 무거운 책들과 은둔 수행자들, 한스 큉, 칼 라너, 칼 바르트, 판넨베르크 등, 종교와 관련된 주변 학문들… 두서없이 이것저것, 닥치는대로 읽은 듯하다. 하나로 꿰어서 ‘내가 읽은 신학 책들’(⟪신학의 영토들⟫을 보라)이라 할 만하지 않다. 

체계적이지는 않을망정 이렇게 신학 책들을 읽은 건 내가 형이상학을 전공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형이상학은 초월적인 것에 대한 감각을 학적으로 궁리하는 분야이다. 차안의 것을 문제삼는 보편적 존재론이라해도 어디까지나 피안의 초월을 전제하고 있으니 형이상학이나 존재론의 한계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의미에서의 ‘신학’이 맞물려 있다. 이것까지 하지 않으면 학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 아무 데서나 신을 찾지 말며, 아무 때나 신을 부르지 말라 

기독교가 국교로서 정해진 곳에서는 행정업무처럼 신심이 계승되겠지만 현대는 초월적인 것에 대한 물음과 탐구가 제기되지 않는 시기이다. 그렇다고해서 인간 자체에 대한 깊이 있는 궁리가 이루어지고 있지도 않는 듯하다. 그저 인간 곁에 있는 사물들, 즉 기계와 기계를 만드는 자본에 대한 탐구와 탐닉이 널리 호응을 얻고 있다. 초월적인 것에 대한 관심과 깨우침을 이야기하면 시대에 뒤처진다는 비아냥을 듣게 되거나 심지어 못 배운 사람 취급을 받기 쉽다. 배웠다는 사람은 무신론이나 불가지론을 견지하면서 사는 것이 온당한 태도라는 것이 은연 중에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근대적 세속화의 성과 중의 하나는 각각의 개인이 신적인 위력으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신념을 모두에게 심어준 것이다. 그 신념에 바탕을 두고, 뜻밖에도 역설적이게도 모든 이가 신에 버금가는 위력을 가지고 있다는 착각을 가지게 되었다. 내가 믿는 것이 진리이고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믿든 다른 사람은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철칙이 세워졌다. 그것을 우리는 ‘신앙의 사사화私事化’ 또는 ‘주체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짐작하건대, 오늘날 우리가, 주체성 많은 한국인들이 모여사는 사회에서 목격하는 무수히 많은 ‘이단들’의 기원일 것이다. 

이단의 만연으로 인해 사방에서 신을 발견하는 뜻밖의 기쁨이 넘쳐나는 세태가 도래하였고 신을 부르는 소리에 온 세상이 떠들썩하다. 그 신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 신이 ‘나’에게 복을 주기만 한다면 된다. 그러한 상황에서 경건한 믿음이나 극적인 회심 따위는 어느 누구도 거들떠 보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세계에서 가장 낮은 출산율로써 아주 빠르게 인구 소멸을 향해 가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는 종교는 물론이고 학문이라 여겨지는 것들은, 할 사람이 아예 없어지고 있다. 

소멸하게 될지 아니면 극적으로 흥성하게 될지, 나중에 어찌될지는, 신(딱 한 번만 신을 불러 보자)에게 맡겨두고 여기에 함께 모인 우리는 학문이라 여겨지는 것에 아주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이들이니 무엇을 어떻게 할지를 같이 궁리해보기로 하자. 

❧ 넓이가 깊이를 만든다 

격동으로 가득 찬 19, 20세기(⟪옥스퍼드 세계사⟫와 같은 글로벌 히스토리를 반드시 읽어야 한다)를 보면 ‘종교’나 ‘학문’은 19세기 이후에야 등장한 분류이고 연원을 따져봐야 17세기 이전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동양’이니 ‘서양’이니 하는 말들도 마찬가지다. 고매한 사제들에게는 심각한 문제였을지는 몰라도 그냥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신념 체계의 구분이나 삶의 방식의 차이가 이들을 갈라놓는 엄청난 장애물이 아니었다. 마크 마조워의 ⟪발칸의 역사⟫에 이런 내용이 있다: “기독교도와 무슬림 사이에 끼어 살며 논쟁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은, 이 둘 중 어느 것이 더 좋은 종교인지 도무지 구분이 안 간다고 털어놓는다. 그러면서도 진리를 거부하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아주 신중하게 두 종교를 함께 믿으면서 금요일에는 모스크에 가고 일요일에는 교회를 다닌다. 어떤 종교를 믿느냐는 질문에 마케도니아의 농부들은 성호를 그으며 ‘우리는 성모마리아를 믿는 무슬림입니다’라고 조심스럽게 답했다.”(p. 116) 

소박하지만 “진리를 거부하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던 이들을 갈라놓은 것은 서구 세계에 기원을 둔 근대적 사고체계(와 그것에 근거한 종교, 학문 분류 체계)였다. 지금은 그 체계가 만든 세계가 급격하게 사라지고 있으며 너무도 당연하게 우리가 공부해야 할 학문의 영역 구분도 근대와는 무관한 것이 되어 가고 있다. 한국 사회의 현실은 벌써 ‘포스트모던’에 이르렀는데 공부 체계는 ‘모던 타임스’에 만들어진 것이 이해 당사자의 욕심에 따라 자잘하게 변형된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내가 공부해 온 철학의 영역은 전면적인 과정 쇄신과 방법 재구성에 착수해야 함이 분명해 보인다. ‘경성제국대학’ 이래의 커리큘럼을 해체하고, ‘서양’에서 표준을 구하지 않으며, 한국의 현실에 근거한 독자적 체계 구성과 해석 작업을 시도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걸 내가 하겠다고 나설 의도는 없고 힘도 없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하는 만큼은 해보고 있다. 한국에서 신학이라는 학문 분과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는 잘 모른다. 그러니 이러한 무지를 무기삼아 신학공부를 이렇게 해보자는 제안을 어설프게라도 해보려 한다. 

기독교(의 교리와 교회)는, 당대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상황과 교호작용하면서, 즉 역사 속에서 변천을 겪어 온 역사적 형성물이다. 이 형성과정을 살펴보지 않으면 신학 공부는 패싸움의 도구로 전락할 것이다. 나는 이것을 ‘사상사로서의 기독교의 역사’(⟪그리스도교, 역사와 만나다⟫, 좋은 책이다)라는 과제로 집약할 수 있다고 본다. 성서를 읽는 것은 많은 방법론이 발전되어 있으니, 구절 하나하나를 읽을 때마다 온 몸을 관통하는 은총의 떨림에 매혹당하지만 않는다면 어렵지 않다. 나는 고전 텍스트는 그렇게 무덤덤하게 읽는 것이라 배웠고 그렇게 읽으라고 권한다. 마지막으로 ‘형이상학으로서의 교리학’도 제안하고 싶다. 나는 형이상학 연구자로서 기독교 신학을 형이상학 근처에 두고 곁눈질하기도 하고 형이상학을 접고 그것만 읽어보기도 하고 그래왔다. 내가 신학에서 가장 흥미를 느끼는 분야가 교리신학이다. 신에 대한 확신을 잠시 접어두고 형이상학 입문서(⟪철학 고전 강의 - 사유하는 유한자 존재하는 무한자⟫를 권한다)와 함께 차근차근 공부하는 것이 좋은 시작일 것이다. 

우리는 ‘동방문제’(Eastern Question) 이전의 발칸 사람들처럼, 나와 똑같은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과도 학적으로 교류해야 하지 않을까. 급격한 인구 소멸과 가족의 해체가 가진 긍정적인 측면은 고루한 관습과 연고에 얽매이지 않는 참된 실존적 개인의 등장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들이 서로 데면데면하면서도 경건한 심성을 추구하는 폭넓은 독서 연대를 만들어 간다면, 길게 늘어난 삶이 고단하지는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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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을 가진 자로서 살아간다는 것 - 1부

📺 믿음을 가진 자로서 살아간다는 것 -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