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작성일: 2018년 1월.
1) 라미 아슈어 출생 & 스쿼시 입문
1987년 9월 30일 이집트 카이로에서 희대의 스쿼시 천재가 태어났다. 풀네임은 라미 모하메드 아슈어. 6살때 아버지의 권유로 스쿼시에 입문하고, 형인 히샴 아슈어와 함께 운동하며 둘이 같이 성인이 된 후에 프로까지 데뷔한다. 현재 히샴 아슈어는 미국 뉴욕에서 스쿼시 아카데미를 운영하며 지도자의 길을 걷고 있다. 암튼, 1987년에 태어난 요 이집트 꼬꼬마는 추후 월드 주니어를 16세의 나이에 형들을 다 제치고 우승해버리고, 그 다음번 월드 주니어에서 또다시 우승하고 주니어 무대를 졸업, 이후 시니어 무대로 나가서 결국 세계 랭킹 1위까지 오르게 된다. 라미가 세운 만 16세 월드 주니어 우승은 역대 최연소 우승 기록이다. 주니어 때는 나이 한 살 차이가 엄청나게 크게 작용하는데, 이런 부분을 감안해보면 라미의 실력과 잠재력이 엄청났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역대 최초로 주니어 대회 2회 연속 우승까지 했는데 이는 정말 전대미문의 기록이었다. 이후 주니어 대회 2회 연속 기록은 모하메드 쇼바기와 마완 쇼바기도 세우긴 했다만. 얘들도 사기 캐릭터 형제임.
2) 라미와 이집트 항공 (Egypt Air)
한국으로 치면 대한항공쯤 될 것 같은데, 라미의 아버지 어머니 모두 이집트 항공에서 근무했다. 즉, 집이 어느 정도 잘 살았다는 얘기. 이집트의 경우, 스쿼시라는 운동을 하려면 집이 좀 받쳐줘야 하는 현실이다. 우리나라처럼 월회원 등록하고 가서 레슨받으며 시작할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라서, 진입장벽이 약간 높다고 볼 수 있는데, 다행히 라미는 이 정도는 후원이 가능한 부모님을 둔 덕분에 스쿼시를 시작할 수 있었다. 스쿼시를 하기 전에는 수영과 승마를 배웠다고 하는데, 역시 있는 집 자식이다. 승마라니.....
여하튼, 이집트 항공에 재직하고 있는 부모님 덕분인지는 몰라도 이집트 항공이 개인 스폰서이고, 이 회사 홍보 영상도 찍었는데, 아래 유튜브 링크를 보면 된다. 언뜻 보면 쉬워 보이지만, 영상 속에서 라미가 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뭐 백번 천번 치다 보면 하나 걸리긴 하겠지만, 카메라가 돌고 있는데 그렇게 한가롭게 샷을 난사할 시간이 있었으리라고 생각되진 않는다.
3) 라미 & 스쿼시
자, 사람들이 제일 궁금해하고 있을 스쿼시에 관한 이야기다. 월드 주니어 대회를 2회 연속으로 우승하고 시니어로 넘어온 라미. 보통의 경우 주니어에서 시니어로 넘어오면 일정 기간 동안 적응기를 거치게 되는데 라미는 거침이 없었다. 2004년 월드 주니어를 우승하고 (16세), 2006년 월드 주니어를 또다시 우승하고 (18세), 이듬해 2007년 1월 Canadian Squash Classic에서 당시 세계 랭킹 2위였던 데이비드 파머를 단 32분 만에 3-0 (11-7, 11-3, 11-4)으로 잡고 시니어 대회 첫 우승을 차지한다. 이건 정말 미친 거다. 이제 막 주니어 무대를 졸업한 신인이 세계 랭킹 2위를 30여 분 만에 잡고 우승을 하다니. 그리고 역시 2007년, 쿠웨이트 오픈에서는 윌스트롭을 4강에서 잡고, 결승에서 사바나까지 30분 만에 잡으면서 두 번째 시니어 우승을 완성시킨다. 이후 꾸준히 상승세를 보이다가 결국 2010년 1월 만 22세의 나이로 세계 랭킹 1위에 오른다. 최근 30년간 현대 스쿼시를 기준으로 했을 때, 당시 기록으로는 역대 최연소 세계 1위다. 2010년 이후로는 닉 매튜와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며 세계 랭킹 1위를 놓고 치열하게 맞붙는다. 라미가 부상으로 쉬기 전까지만 해도 15개월 무패 기록을 세웠고, 통산 승률은 무려 82.2%에 이르렀다. 레전드로 칭송받고 있는 자한기르 칸의 555경기 무패 기록에는 약간 못 미치게 보이지만, 현대 스쿼시만 놓고 보았을 때 82.2%의 승률은 어마어마하게 높은 수치다. 라미가 부상당하기 전, 탑 5에 들던 시절에는 라미를 상대로 상대 전적에서 우위를 보이는 선수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냥 사기 캐릭터 그 자체다. 하지만 고질적인 허벅지 햄스트링과 무릎 부상으로 생각보다 빨리 은퇴를 선언했다.
전 세계 랭킹 1위였던 조나단 파워의 경우, 같은 스윙에서 다양한 샷이 나오기 때문에 상대 입장에서 예측이 정말 어려운 선수였는데, 라미의 경우는 어떤 스윙으로도 똑같은 샷이 나올 수 있다는 점에서 예측이 매우 어렵다고 한다.
4) 독특한 라미의 스쿼시 세계
일단 라미는 코치가 없다. 그 흔한 물리 치료사도 없다. 아무도 없다. 그냥 다 혼자 알아서 하고 투어도 늘 혼자 다닌다. 가령 고띠에는 코치를 비롯하여 팀으로 움직이는데, 라미의 경우는 그냥 혼자 왔다가 혼자 간다. 트레이닝도 정말 아무도 없는 코트에서 사람들 안오는 시간을 골라서 혼자 연습을 하고 간다. 게임이 필요하면 다른 프로 선수들과 연습 게임을 하기도 하지만, 라미의 트레이닝 스케줄은 아무도 모르고 그냥 본인이 하고 싶을 때 와서 하고 싶은 만큼 하고 가는 식이다. 이렇게 아무도 없을 때 혼자 하다 보니, 도대체 뭘 어떻게 연습하는지 알아낼 길이 없다. 암튼, 라미는 연습을 이런 식으로 하고 있다는 점. 운동도 해봐야 2-3 시간 정도만 한다고 한다.
연습 스케줄만 독특한 것이 아니다. 그립 잡는 법과 스윙도 매우 독특하다. 보통 그립을 잡을 때, 엄지와 검지가 V 형태를 이루고 잡으라고 가르치고 배우는데 라미의 그립은 매우 독특하다. 아래 사진을 보면 잘 나와있다. 엄지손가락의 위치를 잘 보시라. 마치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지휘봉을 잡고 있듯이 라켓을 잡는다. 스윙도 독특해서 백스윙을 작게 가져가면서도 남들 풀스윙 파워가 나온다. 손목과 팔뚝 힘이 태생적으로 좋지 않고서는 이게 불가능하다.
[라켓을 잡을 때 엄지손가락을 저렇게 하는 경우는 라미가 이렇게 하고, 알리 파라그도 이렇게 잡긴 한다.]
[라미의 스윙은 다른 선수들과는 조금 다르다. 손목과 팔뚝 힘이 엄청 좋아서 백스윙이 작아도 파워가 다 나온다.]
[라미의 팔로우 스루 동작. 손목을 다 풀어버리는, 이게 어디 일반적으로 가르치는 교과서적인 스윙인가. 그래도 라미는 이 스윙으로 세계 탑이다.]
선수들 사이에서도 라미에 대한 평가는 매우 높다. 알리 파라그는 어릴 때부터 라미와 같은 센터에서 운동하며 친한 사이인데, 어린 시절 자기들의 우상이 라미였다고 하고, 모하메드 쇼바기는 월드 오픈 결승에서 두 번이나 라미에게 패했지만 하나도 부끄럽지 않은 이유는 상대가 라미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상대로부터 이 정도 찬사를 받을 정도라니..
5) 라미 부상에 시달리다.
많은 사람들이 라미가 크고 작은 부상에 시달리고 있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운동선수라면 제일 피하고 싶은 것이 부상일 것이다.
라미가 월드 주니어를 우승하는 2004년 보다 2년 전, 당시 14세의 라미는 전방십자인대 수술을 받게 된다. 당시 우리는 월드컵 4강 진출에 환호하고 있던 그 시기임. 수술은 독일에서 진행되었고, 햄스트링 근육을 잘라다가 십자인대 부위에 이식하는 방식이었다. 99%의 경우, 허벅지 뒤쪽의 햄스트링은 이렇게 도려내어도 다시 재생이 된다고 한다. 하지만, 라미의 경우는 특이한 1%에 해당되는 경우로, 햄스트링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재생이 되지 않았다. 즉, 햄스트링 근육이 도려낸 만큼 없어진 채로 주욱 살아온 셈이다. 아래 사진은 몇 년 전 라미가 공개한 본인의 오른쪽 허벅지 뒤쪽의 햄스트링 상태 사진이다. 그냥 딱 봐도 잘려나간 부분이 재생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재생이 되지 않은 라미의 허벅지 햄스트링.]
여하튼, 라미는 14세의 어린 나이에 전방십자인대 수술을 받고 재활을 거쳐 복귀한다. 어린 시절 라미와 함께 운동했던 알리 파라그의 얘기에 따르면, 전방십자인대 수술 후 복귀하기 전에 라미는 의자를 가져와서 코트 안에 놓고, 거기에 앉아서 드롭샷 연습을 했었다고 한다.
2014년에도 고질적인 햄스트링 부상으로 장기간 휴식기를 가진 후에 복귀를 했는데, 얼마 후에 무릎 반월판 수술을 받느라 또 몇 개월을 쉴 수밖에 없었다 (반월판 수술은 박지성 선수가 받았던 무릎 수술과 동일한 부분). 그 후 어렵게 복귀를 했다가, 작년에는 간에 이상이 생겨서 또다시 대회를 건너뛰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PSA 랭킹도 많이 내려가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대진표 상에서 라미는 시드를 받기 힘들어졌고 자연스레 죽음의 조가 생겨나게 되었다. 일례로 지난 12월 월드 오픈에서는 16강에서 라미와 쇼바기가 맞붙었고, 이번 TOC에서는 마젠 헤샴과 라미가 1라운드에 붙었고, 라미와 폴 콜은 2라운드에서 붙게 되었다. 시드를 받지 못하는 라미가 어디로 가냐에 따라 대진표에서 해당 블록은 그야말로 '핵'이 떨어지는 셈이다.
6) 떠돌이 라미
2014년 경 뉴욕으로 이사 와서 살았던 라미. 집은 어디였을까? 세계 랭킹 1위 출신의 최상위 플레이어는 어떤 집에 살고 있을까? 의외로 라미는 뉴욕의 작은 아파트를 렌트해서 살았다고 한다. 그것도 한 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이곳저곳으로 이사도 자주 다니고, 때로는 친형인 히샴 아슈어의 집에 같이 얹혀 살기도 하고 그런다고 한다. 스쿼시는 세계 랭킹 1위를 한다고 해도, 다른 종목 1위만큼 많은 돈을 벌지 못한다. 세계 랭킹 1위를 달리던 시절의 닉 매튜는 1년에 1억 6천만원을 벌었다. 2020년 기준, 지금 잉글랜드에서 뛰고 있는 손흥민 선수의 주급이 2억인데, 현재 스쿼시 세계 랭킹 1위인 쇼바기의 지난 해 상금 수입은 2억 6천만원 정도이다. 손흥민 2주 축구하면 쇼바기 1년 스쿼시하며 버는 돈보다 많이 나온다. 여하튼, 스쿼시는 돈 벌기가 참 쉽지 않은 종목인 것 같고, 라미는 뉴욕의 어느 곳에서 아파트를 렌트하며 지내고 있다가 은퇴 후에는 이집트와 미국을 오가며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다. 레슨도 하고 시범 경기도 하고. 세계 탑 선수치고는 자의든 타의든 상당히 소박하게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운동하러 가는 길에 본인을 픽업하러 오는 차를 기다리는 라미. 아무리 라미지만, 뉴욕 길거리에서는 아무도 못 알아본다.]
7) 라미의 라켓
너무나 유명한 얘기인데 라미 하면 프린스가 떠오른다. 하지만 라미는 주니어 시절에 헤드를 쓴 적도 있고 프린스를 쓴 적도 있고, 시니어로 넘어온 후에는 던롭을 사용하기도 했다.
위 사진은 던롭 바이오미메틱 맥스 라켓을 들고 있는 라미의 사진이다. 던롭과의 스폰서쉽 재계약이 불발되자 예전에 사용하던 프린스로 옮겼다. 이후 2016년 8월 프린스는 라미와 스폰서쉽 재계약을 마무리 지으며 계속 함께하기로 했다. 그러나, 당시 프린스 회사 자체의 사정이 좋지 않아서, 기존에 프린스에 있던 선수들은 모두 다른 곳으로 옮겨간 상태다. 니콜은 윌슨으로, 고샬은 헤드로, 윌스트롭은 언스쿼서블로.....딱 라미 혼자 남았었는데, 결국 라미가 은퇴하면서 프린스는 이제.....아무도.....없다.....아니, 있긴 하겠지만 우리가 쉽게 떠올렸던 유명한 선수들은 다 떠나가버렸다.
8) 대통령 훈장
2018년 1월 라미는 이집트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았는데, 스쿼시 국가 대표로 뛰며 국가의 위상을 드높여준 공로를 높이 사서 이집트에서 국민이 받을 수 있는 제일 높은 훈장을 받았다. 라미 뿐만 아니라 쉐비니, 가와드, 웰릴리 등 월드 팀 챔피언쉽에서 이집트를 정상에 올려놓은 선수들도 같이 받았다. 여자 프로 골프 LPGA에서 한국 선수들이 초강세를 보이는 것처럼 스쿼시에서는 남녀 모두 이집트가 엄청난 강세를 보이고 있는데, 이집트 국내에서도 이를 모를 리가 없다. 라미 정도면 훈장 받아도 된다고 본다. 그리고 국가 대표가 아닌, 개인 자격으로 출전하는 PSA 투어에서도 매번 이집트 국기를 달고 나오는 라미다. 잉글랜드의 닉 매튜나 윌스트롭이 영국 국기를 달고 나오는거 봤는가. 쟤들은 그런거 안한다.
[라미가 받은 훈장. 아랍어라서 뭐라고 쓰여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훈장인 것은 알겠다.]
9) 은퇴 후 라이프
결국 재생되지 않는 햄스트링과 고질적인 무릎 부상으로 2019년 4월에 갑자기 은퇴를 선언한다. 희대의 천재가 이렇게 가버렸다. 이후 라미는 뉴욕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고 있는 친형을 도와 코칭도 하고 여기저기 시범 경기를 뛰며 아직까지는 라켓을 완전히 내려놓지는 않았다. 2020년 초에는 본인이 고안한 RAM 스코어링 시스템으로 미국 TOC 대회에서 이벤트 게임으로 닉 매튜와 함께 뛰기도 했다. RAM 스코어링은 스쿼시를 11점까지 하는 점수제가 아닌, 축구나 농구처럼 시간제로 하는 경기 시스템인데 라미가 스스로 고안한 점수제이다. 라미 본인에게 제일 유리하게 만든거 아니냐는 의견이 많다만.
이상 라미 아슈어 인물열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