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쿼시 in 이집트 (feat. 무바라크 대통령)

스쿼시 in 이집트 (feat. 무바라크 대통령)

Jul 26, 2021

2020년 5월 현재, 스쿼시 강국이 어디냐고 물어본다면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집트'라고 할 것이다. 맞는 얘기다. 세계 랭킹 10위 안에 남자는 6명, 여자는 4명이 이집트 선수들로 채워져 있으니깐. 그렇다면 이집트가 갑자기 이렇게 잘한 것이냐. 그건 또 아니다. 1930년대에 이미 이집트 스쿼시의 명성을 알린 아머 베이라는 선수가 있었는데 브리티시 오픈을 무려 6회 연속으로 우승해버렸고, 이후 1947년부터 이후 4년간 내리 브리티시 오픈을 우승한 마흐모드 카림이라는 선수도 이집트 출신이었다. 이후 세계 스쿼시의 주도권은 '칸' 패밀리가 등장하면서 파키스탄으로 넘어갔다가 90년대 후반부터 다시 이집트가 주도권을 가져오게 되었다. 아메드 바라다와 아머 사바나에 이어 라미 아슈어, 쇼바기 형제까지 이제는 스쿼시!! 하면 이집트가 떠오르는 시대에 살고 있다. 얘들은 날 때부터 라켓을 쥐고 태어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잘할까?

일단 엄청나게 많은 주니어 선수들이 있다. 선수층이 매우 두껍다는 얘기. 그렇다고 사람 숫자가 많다고 해서 무조건 잘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치면 중국이 월드컵 축구를 매번 우승해야 하는 것이지만, 정작 지난 월드컵 우승은 인구 7천만명의 프랑스가 차지했다. 중국 인구가 15억명 정도라고 치면, 대략 중국 전체 인구의 5% 밖에 되지 않는 프랑스가 우승. 역시 양보다 질이 중요한 법인데, 이집트 스쿼시는 양과 질을 모두 갖추었다고 보면 되겠다. 이집트 U11 주니어 대회에 참가는 선수가 600명가량 된다고 하니, 그 위에 U13, U15, U17, U19를 다 합치며 얼마나 많은 선수가 나온단 말인가. 우리나라는 아마 전 연령대의 주니어 선수를 다 합쳐도 600명이 안나올텐데.....

이렇게 많은 선수들이 바글바글하게 그리고 빡쎄게 경쟁을 하다 보니 이집트 스쿼시는 강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결론이다. 뭐, 이건 어찌 보면 뻔한 얘기고 누구나 다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이야기다. 스쿼시포스트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서 어찌하여 이런 환경이 만들어졌는지에 대해 파헤져봤다. 자, 그럼 본론 나간다.

이집트의 공군 장성 출신인 호스니 무바라크. 1981년부터 2011년까지 무려 30년간 이집트의 대통령 자리를 유지했다. 그냥 한 마디로 독재. 독재자의 끝은 늘 비슷해서, 무바라크 역시 2011년 이집트 혁명으로 인해 내려와야 했는데, 복잡한 이집트 역사는 제쳐놓고 스쿼시와 관련된 부분만 얘기해보자.
[99년 한국을 방문한 무바라크.]

일단 기본적으로 스쿼시를 매우매우매우매우매우 좋아하는 사람이 무바라크였다고 한다. 그렇다고 선수 생활을 했던 것은 아니고, 그냥 동호인 수준이었다고 하는데 엄청난 스쿼시 광팬이었다고 한다. 저쯤 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니깐 같이 게임치는 사람이 무작정 공을 줘 팰 수만은 없었을테고 적당히 접대 스쿼시를 쳐줬지 않았나 하는 예상이 들긴 하지만, 여기저기 자료를 찾아보면 무바라크 전 대통령의 스쿼시 실력이 결코 허접하지만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스쿼시를 치고 있는 무바라크. 엄청난 스쿼시 팬이었다고 한다.]

1981년 대통령 자리에 오르고 10여년이 지난 1990년대 중반. 무바라크는 집권 후 주요 자리에 본인의 오른팔 왼팔 인사들을 임명하여 권력을 단단하게 다져왔다. 즉, 이후부터는 '무바라크 하고 싶은 대로 해!'가 가능해졌다는 얘기. 그리하여 1996년에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이집트 피라미드 앞에서 유리 코트 짓고 열린 PSA 대회인 Al-Alhram 대회가 열리게 된다. 아래 사진은 많이들 봤을 텐데, 저 사진이 나오는데까지 무바라크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다고 한다. 한 마디로 국가 차원에서 밀어줬다는 얘기다.

[1996년 이집트 피라미드 앞에서 열린 Al-Ahram 대회.]

당시 이집트의 에이스는 아메드 바라다(세계 랭킹 2위까지 올라갔음)였는데, 1996년 첫 대회에서는 아쉽게 2위에 그치지만 그 상대가 누구였나를 보면 이해도 간다. 당시 아메드 바라다의 결승전 상대는 잔셔 칸. 1996년 시점이라면 잔셔 칸의 전성기였는데, 이거는 그냥 캐사기 캐릭터 잔셔 칸 시절이었기 때문에 2위면 할 만큼 한 거라고 보면 된다. 하지만 2년 후 1998년 대회에서는 홈 관중들 앞에서 우승컵을 들어 올리는 아메드 바라다. 이집트 스쿼시의 영웅이 되어버린다. 아메드 바라다의 뒤를 이어 아머 사바나가 등장하며 이집트 스쿼시의 강세를 이어가게 된다.

피라미드 앞에서 열린 스쿼시 대회. 당시 이것은 매우 파격적인 대회 장소였고 흥행에도 크게 성공했다. 2001년을 끝으로 한동안 피라미드 앞에서 하던 Al-Ahram 대회가 열리지 않게 되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사진으로나마 '와우 피라미드 앞에서도 대회를 했었어?'하며 많이 회자된 이벤트이기도 했다. 이후 스쿼시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주던 무바라크가 퇴진하였지만, 당시 무바라크의 스쿼시 지원 정책에 힘입어 자라난 새싹들이 PSA를 씹어먹으며 보여준 활약 덕분에 Al-Ahram 대회는 2016년 부활하게 되고, 남자는 가와드-여자는 웰릴리가 돌아온 Al-Ahram 대회 우승자가 되었다.

[2016년 Al-Ahram 대회. 1996년 사진과 비교해보면 묘한 향수를 일으킨다.]

역사 얘기를 조금만 더 해보자.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사실은 아니지만 이집트가 잠깐 영국의 보호하에 있던 시절이 있었다. 1830년쯤에 스쿼시가 영국에서 만들어졌고, 쭉쭉쭉 퍼져나갈 즘 1870년대쯤에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를 영국이 소유하게 되면서 이집트에 감놔라 배놔라 영국이 참견을 많이 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영국의 목표는 이집트 식민지화그러나 결국엔 식민지 플랜은 실패함.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깡패짓을 많이 하던 영국이니 놀랍지도 않다. 여하튼, 이렇게 시시콜콜 귀찮게 하니깐 이집트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는데, 이게 영국군에 의해 쉽게 진압되면서 이집트에 영국군이 주둔하게 되는 놀라운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이후 영국 장교들의 복지를 위해 스포츠 클럽들이 지어졌고, 여기서 일하는 볼보이나 스태프로 이집트의 어린 청년들이 많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센터 영업시간이 끝난 후에는 볼보이나 스태프들도 자유롭게 스쿼시를 쳐볼 수 있게 되어있었는데, 이렇게 영국군이 주둔하며 그들이 지어놓은 센터에 스쿼시 코트가 있었고 자연스레 스쿼시를 접하게 되는 이집트. 스쿼시만 놓고 보면 시작부터가 다른 나라보다 유리했다. 그리고 위에 언급한 아머 베이를 시작으로 이집트는 스쿼시에서 강세를 보이기 시작한다. 참고로 아머 베이는 이집트-영국을 오가는 외교관 출신이다 보니 스쿼시를 영국에서 처음 시작했고 원래 주 종목은 테니스였다고 한다. 그런데 스쿼시에 소질이 있었는지 폭발적으로 실력이 늘어서 저렇게 브리티시 오픈도 6회나 우승하고 그랬다고 한다. 은퇴 후 영국 주재 이집트 대사로 근무.

종합해보면, 일찍부터 종주국인 영국의 영향을 받아 스쿼시가 빠르게 들어왔고, 이후 스쿼시를 빨리 흡수하며 잘하는 선수가 배출된 이집트. 이후 현대로 넘어오면서 무바라크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지와 엄청난 인프라 확충을 통해 제2의 전성기를 달리고 있는 이집트 되겠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스쿼시가 더 대중화되려면 어떤 이벤트가 있으면 좋을까하고 이야기하다 보면, 스쿼시계의 김연아가 탄생해야 한다 혹은 엄청 인기 많은 연예인이 스쿼시를 해서 이게 TV로 떠야 한다 등등 많은 의견이 있지만 현실적으로 팍팍 밀어 부칠 수 있으려면 무바라크처럼 정치권에서 스쿼시를 밀어주면 매우 쉽게 인프라 구축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이집트를 통해보았다. 하지만 이게 우리나라 실정에는 잘 들어맞지 않을 수도 있는게 무바라크는 독재자였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다했지, 우리나라는 이게 잘 안될 수도 있겠다는.....여하튼, 뭐 이집트 스쿼시는 저랬다는 점.

무바라크가 저렇게 스쿼시를 밀어줘서 많은 스쿼시 선수들이 탄생할 수 있었지만, 이 과정에서 한 가지 아이러니한 상황이 만들어졌다. 스쿼시 광팬이지만 독재자였던 무바라크. 그의 스쿼시 지원 정책 덕분에 나올 수 있었던 세계 랭킹 1위 출신의 아머 사바나. 하지만 정작 사바나는 독재자 무바라크 퇴진 운동으로 인해 불안정해진 치안 때문에 온 가족이 뉴욕을 거처 캐나다로 이민을 가버렸다. 라미 아슈어 역시 무바라크의 스쿼시 정책 덕분에 나올 수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라미 본인은 독재자 무바라크 퇴진 운동에 찬성표를 던진 사람 중 한 명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무바라크가 스쿼시를 지원했던 얘기에 초점을 둬서 쓰긴 했지만, 독재자는 독재자였고 이로 인해 많은 부정부패가 이집트에서 많았다고 한다. 본 포스팅은 독재자 쉴드 쳐주려는 목적이 아니라 스쿼시에 관련된 에피소드를 전하는 것이니 쓸데없는 태클은 사양한다. 발 들어오면 지그시 밟아버리겠음. 요즘 바빠죽겠는데.

스쿼시 in 이집트 끝.

p.s. 라미는 역시 할 말 다하는 캐릭터다. 그 외 타렉 모멘, 카람 다위시는 무바라크에 대한 뉴욕 타임스 기자의 질문에 그냥 원론적인 대답만 했는데 라미는 자신의 생각을 확실하게 전달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2011년 TOC 대회 결승에서 닉 매튜를 잡고 우승한 후 바로 이집트로 돌아가서 타히르 광장에 모인 무바라크 퇴진 운동에 합류했다. 우리로 치면 외국에서 투어 대회 우승하고 끝나자마자 바로 들어와서 촛불 집회에 참석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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